외할머니의 유산
아직 6월 초인데, 낮기온은 한여름이고 밤도 거의 열대야 수준이다. 아직 투명박스에 들어있던 한여름 옷들을 꺼내어 서랍에 넣고, 몇 번쯤 더 입지 않을까 싶어 가까이 뒀던 긴팔셔츠를 세탁기에 넣었다.
그러면서 꺼내 입은 흰색 민소매 티셔츠..나일론 혼방쯤 되는 듯 촉감이 시원하고 크기가 넉넉해서 오늘밤에 입기에 딱이다. 아직은 정신이 맑으실 때 외할머니가 주셨던 옷이다. 어렸을 땐(그러니까 할머니가 좀 더 젊으셨을 땐) 만나면 얼마씩 용돈도 주시곤 했는데 그때 즈음엔 나도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난 후였고, 사정도 별로 여의치 않으셨던 것 같다. 그날따라 유난히 당신이 가지신 것 중 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, 이 셔츠와, 꽃무늬 양산, 엄마가 줬지만 안 쓰고 아끼셨던 대용량 향수였다.
친할머니보다 연세가 많으시고 덜 배우신 분이어서 어린 마음에 대하기에 더 어려웠던 기억이 있지만 나를 무척 대견해 하셨는데..
내가 나이를 먹어서인지 돌아가신 후라서인지 해가 갈수록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다.

외할머니가 물려주신 것 또 한 가지는 삭힌 홍어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. 할머니의 상을 치르는 3일동안 매 끼니를 장례식장 육개장과 함께 삭힌 홍어를 먹다보니 조금씩 더 삭아가는 홍어의 참맛을 알게 된 것 같다. 화장까지 모든 절차를 마친 후 마지막 식사에는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완전히 삭은 홍어로 무침을 만들어 주셨다.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밥맛도 좋고 너무 잘 먹는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정말로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모두 맛있었다. 그때도 지금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이 별로 실감나진 않는다.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고, 마지막에 병원에 입원하신 모습을 한 번 뵙긴 했지만 그냥 그대로 입원해 계셔서 명절 때도 못 오시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..
근데 사실은 그 후로 한참동안 엄마가 힘들어 하시는 걸 보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실감하는 것이 두려웠다. 언젠간 아마 20년쯤 후엔(*.*) 나도 겪을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이렇게 쓰는 중에도 벌써 눈물이 흐른다. 그래서 그저 가까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.

나중엔 어떻게 할 지 그 때 일이고, 지금은 현실을 회피하면서(-.-) 할머니가 주신 셔츠를 입고 향수를 방향제 삼아 뿌리며 할머니의 사랑을 되새길까 한다..
by 블루치즈 | 2010/06/09 02:58 | feedback | 트랙백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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